[장흥읍] 원도1구 (원도마을)
본문


일반현황
■ 원도 마을은 1067년경(또는 고려 인종 때) 왕조의 공공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설치된 교통 통신기관이던 역참(驛站)인 ‘벽산역(碧山驛)’이 현재의 관덕리 동백(冬柏)마을에 조성되면서 역무에 종사자들이 역참 주변지인 지금의 원도마을 터에 거주하게 됨에 따라 마을이 자연스레 형성되면서 본래의 마을 이름은 ‘역촌(驛村)’으로 불림
■ 이후 1457년에 ‘벽산역(碧山驛)’이 ‘벽사역(碧沙驛)’으로 이름이 바뀌고, 찰방(察訪)이 집무하면서 전라좌도 9개소의 역승(驛丞)을 관리하게 되어 보다 많은 역무(驛務)를 수행하는 종사자가 늘어나면서 마을이 확대되면서 찰방(察訪)이 집무하던 관아(官衙)와 마방(馬房)이 있는 곳을 중심마을로 하여 아래쪽에 위치하므로 ‘벽계하리(碧溪下里)’, ‘벽계리(碧溪里)’라 하여 1896년 역참제가 폐지될 때까지 유지되다가 1900년경에 이르러 지금의 이름인 ‘원도리(元道里)’로 개명됨
■ ‘원도리’라는 이름은 전라감사 역임하고 형조참판을 지내던 원두표(元斗杓)가 1642년도에 묵어간 마을이라 하여 일본인들이 ‘원두’라는 발음을 하지 못하고 ‘원도’라 발음하게 되면서부터 ‘원도리(元道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함
■ 마을 앞으로 옛 장흥교도소와 장흥농업기술센터가 위치해 있으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며 급격히 시내권으로 편입되고 있음
■ 마을 바로 뒤편에 해발 150m 정도의 마을 쉼터인 야산(산짓동)이 있으며, 제암산과 사자산을 진산으로 하고 있음
■ 마을 앞 들녘 북쪽으로 큰 방죽이 있었는데, 해방 후 수리개량조합에서 저수지로 개축함
■ 마을 앞 들녘에 있는 공알바위는 공알 바위의 껍질이 벗겨지면 처녀나 과부가 바람이 난다는 설에 의해 공알바위라고 불림
■ 마을 앞 도로변 공동우물로 사용되었던 통시암(샘)이 있는데, 수도시설이 갖춰지기 전 마을 아낙네들이 물동이로 식수를 길어 나르기도 하고 빨래를 하기도 했다 함
문화자원현황
분류 |
주제 |
자원현황 |
문화 |
영화, 영상 |
(구)장흥교도소가 각종 영화와 드라마 촬영장으로 이용 |
축제, 행사 |
매년 정월 보름 풍년농사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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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음악, 문학, 미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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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 |
부녀회 20명 이상, 노인회 20명 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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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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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집 |
현대가옥과 시멘트 벽돌담, 공동주택이 있음 |
풍경 |
당산목(300년된 팽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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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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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공간 |
통샘, 공알바위, 산짓둥, (구)장흥교도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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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 |
장흥군 농업기술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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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
건강, 의료 |
장흥읍내 의료시설 이용 |
교육 |
장흥초·중학교, 장흥여자중학교, 장흥고등학교(1km 내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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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 |
마을경유 버스노선 1개, 운행 횟수 1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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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상권 |
장흥읍내 시장상권 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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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
주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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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인, 연구자, 학자 |
김두헌(철학자, 교육자), 정두채(장흥 강진 해남 우체국장) 정정진(장흥군의회의원), 김화자(장흥군 최초 여성 군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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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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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인적자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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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역사·문화 |
연곡서원 |
변화 |
도로(신작로), 1970년 지붕개량사업, 2008년 마을회관 건립, 1971년 경리정리, 장흥교도소 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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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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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자원
구분 | 관련사진 | 주요내용 |
(구)장흥 교도소 | ![]() |
- 1975년 문을 연 옛 장흥교도소는 장흥읍 원도리 9만318m² 부지에 42개동의 수감시설을 갖췄음 |
연곡서원 | ![]() |
- 장흥군 장흥읍 원도리 46번지에는 영조대왕이 사액(賜額)한 연곡서원(淵谷書院)이 위치함 |
마을 주요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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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도1구회관 | 회관 앞 정자나무, 소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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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장흥교도소 (각종 촬영장으로 이용) | 장흥군 농업기술센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