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정보

[관산] 삼산1구(산서마을)

본문


일반현황

■ 관산읍사무소에서 남쪽으로 약 4.5km 지점 평야지에 있는 마을로 경주이씨 집성촌이며 마을 전체 90여 호 중, 70호 이상이 경주이씨임
■ 구전에 의하면 1595년경 개산공 이주(李注, 1564~1594)가 전란 때 이순신 휘하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남해안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인이 남편의 시신이라도 수습하기 위해 아들을 데리고 남해안을 헤매다가 인근 부안곡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하며 이후 마을 앞으로 이주하였다가 1600년 경 다시 이곳으로 옮겨 오늘에 이름
■ 삼산리(三山里)는 본래 고하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산서(山西), 산동(山東), 우산(牛山)을 병합한 곳으로 3개 마을에 산(山)자가 붙어 삼산리라 하여 고읍면에 편입되었고, 이후 1961년 관덕지구 간척사업 개척민들의 집단 거주를 위한 촌락이 형성됨
■ 마을의 형국이 벼루에 물을 부은 것 같다 해서 산연(山硯)이라고 하며, 키(챙이)형국 이라고도 함
■ 1580년경 경주이씨 이국세가 이곳에 입촌할 때 마을의 동서남북으로 나무를 심었는데 그중 남쪽에 심은 600년 된 후박나무만이 지금까지 남아있으며, 현재 천연기념물 제481호로 지정된 우리나라 3대 후박나무로 칭해짐
■ 광활한 관덕농장이 조성되어 있어 비교적 여유 있는 농촌마을로 인근 남쪽해변에는 1961년에 간척으로 조성된 광활한 농경지가 펼쳐져 있음
■ 60%가 농축산업, 40%가 어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대부분 벼농사를 짓고 한우 2,000두를 사육하고 있으며, 김 양식으로 경제활동을 함
■ 마을 입구에는 충효문, 세장비가 있으며, 조상의 넋을 기리는 삼산사, 서당 역할을 하는 경주이씨 종친 제각 등 문화 역사가 깊은 마을임
 

문화자원현황

분류

주제

자원현황

문화

영화, 영상

-

축제, 행사

명절 때 노래자랑, 보름 때 짚신놀이를 함

예술(음악, 문학, 미술)

-

모임

청년회, 부녀회, 노인회, 풍물놀이패(40명)

종교

교회

장소

현대가옥이 많음

풍경

벼루에 물을 부은 것 같은 키(챙이)형국으로 간척으로 조성된 광활한 농경지가 있음

깨끗하게 정돈된 마을 길

이색공간

경주이씨 제각, 마을 초입에 충효문과 세장비가 있음, 우산저수지공원, 삼산사, 정남진전망대

기관

산서복지관, 산서어업인회관, 삼성경로당

생활

건강, 의료

삼산보건진료소

교육

관산남초등학교(1.4km), 관산고등학교(5km)

교통

마을경유 버스노선 1개, 운행 횟수 5회

시장, 상권

관산읍 상권이용(5.6km)

인물

주민

장흥 보리수악단 단원 2명 거주, 98세 최고령자

유명인, 연구자, 학자

이일호(영문학박사), 이승현(물리학박사)

예술가

이권호(서예가), 이춘희(화가)

기타 인적자원

이상덕(1961년 간척사업, 농경지조성에 공헌), 이채석(주택공사 충북지사장), 이재만(광주 남구의원), 이삼전(서울 성북구의원), 이광희(국방부 서기관), 이승량(변호사), 이재순(육군 중령) 등

역사

역사·문화

천연기념물 제481호(600년된 후박나무)

변화

1961년 관덕지구 간척사업으로 촌락 형성,

1965년 간척지 완공과 함께 산서마을 1개 반으로 편입,

1970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관덕마을이 삼산4구로 산서에서 분리

사건

-


대표자원

구분 관련사진 주요내용
삼산리 후박나무 02_b_01_01.jpg

- 천연기념물 제481호로 1580년경 경주이씨 이국세가 입촌할 때 마을의 동서남북 방향에 나무를 심었는데 현재 남쪽에 심은 나무만 남았다고 전해짐
- 삼산리 후박나무는 세 그루가 한 무더기로 어우러져 하나의 수관을 이루고 있으며, 마을의 역사를 함께해온 당산목으로 주민들의 쉼터로 이용되고 있음
- 주로 해안지방에서 자생하는 후박나무가 육지에서 이만한 크기로 생육하는 것은 흔치않은 일로 학술자료로써 가치를 가지고 있음

삼산사(三山祠) 02_b_01_02.jpg

- 관산읍 삼산리 499-1번지 산서마을 내 위치한 사우로 1944년 9월 창건함
- 16세 문충공 익재, 이재현(1287~1367)선생을 주벽으로 하고 25세 수문장공 개산 이주(1564~1594), 27세 도사공 붕운 이귀희, 33세 호조판서공 단암 이관빈(1755~1822), 24세 호조판잠공 수명당 이동의(1775~1834) 등 5位을 배향하여 제향을 매년 음력 9월 20일 지역 유림에서 주관 봉행함

경주이씨 충효문 02_b_01_03.jpg

- 1879년에 마을 입구에 목조와가를 건축함
- 이관빈과 그의 아들 이동의의 충효를 기리기 위해 고종이 명하여 건립한 정려물임
- 부자의 충효정신을 높이 평가해 1879년 이조판서 김병학이 충효록에 기록하고 현판서를 증하여 충효문을 마을 초입에 세움

세장비 02_b_01_04.jpg

- 1982년 경주이씨 개산공파 산서종중에서 마을 입구에 근수함
- 비문 내용은 고려 문충공 이재현 선생의 업적, 개산공 이주의 임진왜란 참전 공훈과 아들 이국세의 산연 정착(산서마을)과정, 도사공 이귀희의 행적, 호조판서공 이관빈과 수명당이동의 부자의 행적과 충효를 기린다고 기술함


마을 주요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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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산리 후박나무(천연기념물 제481호) 후박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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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장비 삼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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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저수지 삼산보건진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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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서복지관 삼성경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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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서어업인회관 마을무대(어업인회관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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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문 정남진전망대